푸른 골짜기
성인사제 연구과제 발표안(7-8분용) 본문
김대건 신부님 편지 내용 요약 및 분석
(첫 번째~열 번째 편지)
희망의모후 1111꾸리아 소속 영광의어머니 쁘레시디움 정기활 요한입니다.
숭고한 성인의 뜻이 담긴 편지글 내용 분석으로 감히 이 자리에 서게 되어 송구스런 맘 앞섭니다.
먼저 편짓글의 내용 요약을 말씀드리면
: 첫 번째에서 열 번째 편지는 1842년~45년까지 3년 남짓의 기간에 필리핀의 마닐라, 동중국해의 주산군도, 상해, 요동의 백가점, 몽고 소팔가자, 그리고 서울에서 그의 스승인 르그레주아, 리부아 신부, 페레올 주교에게 발송한 편지입니다.
이 시기 김대건은 마카오의 민란으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와 마카오 대표부를 오가며 철학, 신학에 대한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학업도 사정상 중단되고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에리곤호 라는 프랑스 군함에 승선, 세실 선장의 통역관 역할을 맡게 됩니다. 주산 군도와 상해를 거처 남경 조약 조인식 참석, 보인사 관람 등을 하면서도 수시로 선교사들의 입국 기회를 모색했으나 세실 선장과 뜻이 달라 조선으로 가는 길은 멀기만 했습니다.
결국 베지 주교의 배려로 어떤 신자의 배를 타고 요동땅 태장하에 입항했고, 이후 백가점과 소팔가자에 머물며 입국을 시도하게 됩니다.
조선과 중국의 국경지대인 변문에서 북경 사신단 일행 중에서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 신자들의 박해와 순교 소식 접하면서도 2000리 밖의 훈춘, 함경도 경원까지 오가며 선교사들의 안전한 입국을 탐색했으나 여의치 못했습니다. 그 활로를 뚫은 분이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은 김대건 안드레아였습니다. 그는 1845년 1월 굶주림과 추위 속에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단독으로 서울에 도착하게 되며, 새롭게 중국 강남 가는 뱃길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스승께 알리는 것 까지가 이 편지글의 간추린 내용입니다.
다음은 편짓글 분석으로 우선 선교사들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면
마카오 대표부의 스승으로 르그레즈와, 리브아 신부가 있었고 파견대기 중이던 베르뇌, 메스트로 신부에게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민란으로 대피했던 마닐라에서는 데플레슈 신부의 지도로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백가점과 소팔가자에서는 주로 메스트로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간접적으로는 기해박해 때 조선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도 후일 김대건이 순교로서 끝까지 선교 사명을 다하게 된 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선교사들에 대해 그는 부모님 모시듯 깍듯한 예의와 지극한 공경으로 대한 것이 편지 중에 잘 나타납니다. 이는 그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강한 믿음과 예수님, 성모님에 대한 최고의 공경과 사랑이 영향을 끼쳐 그 가르침을 준 스승 신부께도 존경과 순명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편지에 드러난 신앙 및 선교 이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느님, 예수님, 마리아, 요셉, 성모님, 공경하올 신부님 등의 용어가 편지글 중에 수시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하느님, 예수님에 대한 신심이 생활화 되어 있었고 주교님, 신부님에 대한 제자로서, 아들로서의 예의, 공경심, 순명정신이 투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수시로 하느님과 ,성모님의 보호하심에 의탁한 것으로 보아 주님과 성모님에 대한 믿음이 각별했음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고 문호를 개방하는 것만이 당시 암울했던 국가와 민족을 위해 꼭 필요한 길이라 생각했습니다.
1839년 기해 박해로 인한 국내 선교사와 부모님을 포함한 많은 신자들의 고난과 순교 소식을 접하면서도 지속적으로 입국 기회를 엿보며 빗장을 잠근 조국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은 죽음을 각오한 선교 정신, 참 그리스도 정신, 민족을 구하겠다는 애족심이 표출된 것으로 높이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음은 편지에 드러난 인간관, 국가관, 세계관에 대해 뭉퉁그려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짧은 신학교 수학 기간에 프랑스어, 중국어 등 여러 나라 언어에 익숙해진 것으로 보아 깊은 신심과 더불어 총명함을 갖추었고, 체포 순간을 피해나가는 기지, 대담성,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는 신중함, 결단력을 겸비했음이 편지 곳곳에 나타납니다. 편지글 말미에 여러 차례 김해 김씨 라는 본관을 표기하고 부모님에 대한 소식을 탐문한 것으로 보아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두터웠고, 조선의 아기들에게 유행하던 천연두 처방을 스승께 청한 것으로 보아 민족애와 더불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 대한 동정심도 강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세 동점의 당시 세계사의 큰 흐름을 직시한 그는 영국-중국간의 아편전쟁이 남경조약으로 이어지는 현장을 직접 체험하고, 프랑스 군함에 승선하여 자국의 이권을 확보하려는 서양 나라들의 실체를 파악케 되면서 문호를 닫고 있는 조국에 대한 애절한 마음이 더해 선교 정신이 더욱 강하게 다져진 것으로 보입니다. 서적과 성경, 성물, 컴퍼스, 철필, 조선해변지도, 세계지도 등을 구한 것으로 볼 때 조국의 개화에 대한 소망과 함께 동, 서양이 그리스도 신앙으로 하나 되는 세계를 꿈꾸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 그 분은 순교자로 가톨릭교회에서 성인으로 추앙 받고 있지만, 다른 측면으로는 조국의 개화를 촉구한 겨레의 선각자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맘껏 누리는 이 신앙의 자유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위시한 순교자 선조들의 피와 땀으로 성취된 것임을 항시 잊지 말고 가톨릭 신앙을 널리 알리는데 마땅히 힘써야 할 것입니다.
끝으로
소중한 발표 기회를 주신 신부님과 본당의 여러 교우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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